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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도시인문학 국내학술대회 - 디지털 폴리스와 도시 정의의 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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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22-04-05 12:58 조회 1,02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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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문학연구소는 3월 25일 ‘디지털 폴리스와 도시 정의의 쟁점들’이란 주제로 온라인 국내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학술대회는 저명한 국내 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디지털 폴리스의 정의와 디지털 폴리스와 관련된 쟁점들에 대해 논의하고 탐구하는 토론의 장이 되었다. 발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부, 사회자: 이중원


발표1: 김은주

주제: 디지털 폴리스의 정의와 커먼즈를 다시 사유하기


  현대의 디지털 폴리스는 이전의 도시와는 달리 디지털화를 거치며 그 자체로 거대한 매체가 되었다. 즉 단일한 개체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으로 여러 장치와 연결되는 복합 네트워크가 된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폴리스는 근대적 영토 경계를 조건으로 도시 내부의 자원 문제로 논의할 것이 아니라, 디지털 폴리스가 인간적 행위자와 비인간적 행위자 그리고 디지털 기술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적 실재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이라는 의미의 ‘커먼즈’의 차원에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서울시가 추진한 스마트서울플랫폼 중 하나인 ‘예스맵’은 가상의 공간에 서울시를 그대로 재현하겠다는 목적 아래에서 이루어진 프로젝트이다. 그러나 서울시의 행정 구역 너머까지 구현하지는 못했는데, 이는 디지털로 구현된 서울 역시 근대적이고 유클리드적인 공간 사유로 이해되고 있고 커먼즈 또한 도시 내부에서 이용되어야 할 자원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커먼즈를 단순히 자원으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현대 도시를 기존의 이해방식으로 정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여기에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거품’ 개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거품은 일종의 개체로서 하나의 환경을 구성한다. 거품에는 거품막이라는 경계가 있지만 이것은 거품과 거품 사이의 공유의 경계이며 동시에 유동적이다. 이러한 거품들의 연합은 디지털 폴리스의 공간적 다원성과 권력의 다중성을 지닌 일종의 네트워크인 셈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커먼즈는 단지 자원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로 연결된 행위자들이 상호작용인 커머닝을 통해 생성된다. 결국 현대의 도시는 관계적 실재로서 디지털 기술을 통해 경계를 넘어 공존, 공생하는 디지털 심-폴리스로 사유되어야 할 것이다.


토론: 김애령


  커먼즈가 무엇인가. 그 자체로 자명하며 공평하게 공유되는 실체가 아니라 관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다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해야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서울시가 추진한 예스맵 또한 디지털 커먼즈라고 할 수 있는가? 예스맵은 도시계획과 개발, 그리고 서울시 공공건축물의 설계 공모 평가 등 여러 방면에서 사용될 예정이다. 또한 모든 디지털 사용자가 활용할 수 있는 지도라는 점에서 예스맵은 디지털 커먼즈로 볼 수 있는 것인가.


김은주의 간단한 답변


  커먼즈를 자원으로 보는 관점의 문제는 관계를 배제한 폐쇄성에 있다. 커먼즈의 분명한 정의는 보다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나 예스맵의 경우엔 공공성보다는 경계 문제에 보다 비중을 두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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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2: 홍남희

주제: 기술 매개 시대 (부)정의와 데이터 액티비즘


  오늘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은 다양한 디지털 기기와 기술에 의해 데이터화 되고 있다. 이전에는 수량화될 수 없었던 정서, 생체리듬, 취향 등 다양한 개인 정보와 사회적 행위가 수치화되고 코드화된다. 이러한 데이터화는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과 부정의를 반영하며 이를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데이터화에서 표준의 데이터 주체는 표준적이고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남성 주체로 상정된다. 때문에 데이터화를 통해 발생하는 부정의의 효과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이나 여성 등 취약 집단에게 특히 가중된다. 결국 데이터는 그 자체로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불평등한 사회관계의 산물이며, 따라서 현재의 권력과 기술 체계를 유지하는 데이터 윤리 논의에서 권력 질서에 도전하는 데이터 정의로의 논의 전환이 필요하다.


  데이터 액티비즘은 데이터화에 저항하기 위한 사회적 정치적 실천이다. 이는 데이터 기술의 역할을 강조하여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행동주의로써, 기술 사회의 작동 원리를 이용해 특정 담론을 가시화하거나 부정의 사례를 축적하는 등 다양한 시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데이터 액티비즘 실천은 일반 이용자들에게 부정의를 의식화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기술 전문가가 매개되어야 하고, 개별화된 반항이란 점에서 근본적인 변혁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토론: 이희은


  데이터와 감시사회에서 정의가 어떻게 해석되고 오해되는지에 대한 정교한 설명이 필요하다. 정의는 주로 재화의 공정한 분배 정도로 이해되나 데이터 사회에서는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취약 계층으로써 갖는 물질화되지 않는 측면의 부정의를 포함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며, 법이나 행정 절차 이외의 논의가 가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데이터 액티비즘이 일부 성과를 거두긴 했으나 일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 특히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된 피해자에게 더욱 무거운 무게가 지워지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홍남희의 짧은 답변

  이전엔 프라이버시 침해나 부정의에 대한 인식 자체가 약했으나 액티비즘 실천으로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데까지 올 수 있었다. 정의에 대한 정교한 정의에는 젠더화된 주체들이 겪는 물질화되지 않은 부정의를 핵심적인 요소로 추가해야 할 것이다. 

  디지털 장의사 등 방안이 있으나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피해자 구제 대책이 개인에서 국가 차원으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액티비즘 실천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정치적 담론화 작업에 참여하거나 기술 개선 등 다양한 주체들의 참여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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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사회자: 서우석


발표3: 채석진

주제: 플랫폼과 문화 생산: 자동화된 노동과 문화의 불평등


발표3 플랫폼과 문화 생산: 자동화된 노동과 문화의 불평등, 채석진


  도시 공간엔 수많은 시선이 작동하고 있고, 특정한 사람들의 가시성은 도시 공간이 누구를 중심으로 작동하는지를 드러낸다. 도시 공간에서 우리의 경험은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이중 구조 속에서 구성되는데, 특히 스마트폰을 매개로 한 네트워크 플랫폼 노동자들의 가시성과 비가시성이라는 복잡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드러낼 수가 있다.


  배달 노동은 임금 노동자에서 프리랜서로 그리고 플랫폼 노동자로 고용 상태, 노동 조건이 변화해왔다. 플랫폼을 운영하는 회사는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시간 주권을 내세웠으나 실제로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 통제력은 축소되었다. 시간에 대한 통제력은 예측을 기반으로 구성되는데, 플랫폼 노동은 주문 양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예측과 계획의 불가능은 방대한 규모의 ‘기다리는 노동’을 형성한다. 어플을 통해 노동자들이 가시성을 획득한 것으로 보이나 그 너머 노동자들의 노동은 불평등을 야기하는 비가시적 노동이 되는 것이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이 비가시성을 가지는 반면 노동자의 신체는 가시성을 갖게 된다. 플랫폼 규모가 커지면서 비숙련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는데 이는 기존의 숙련 노동자와 신규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야기한다. 플랫폼의 자동화된 노동 과정 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은 서로를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신고한다. 이 과정에서 불평등 관계는 기업과 노동자가 아니라 숙련과 비숙련, 전업과 비전업이란 위계 질서 속에서 작동하며 이 구조를 더욱 강화시킨다. 또한 배달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음식점, 배달 노동자, 주문자가 끊임없이 다투게 되는데 결국 기술적 연결망에서 작동하는 시간과 물리적 공간의 충돌을 겪는 배달 노동자가 이에 대한 비난을 온 몸으로 받으면서 초가시성을 부여받는다.


  결국 높은 수준의 시간 압박을 형성하는 기술적 연결망은 비가시적이지만 이를 실행하는 플랫폼 노동자는 가시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효율적인 시간 관리를 위한 시간 주권을 플랫폼 노동자가 확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플랫폼 노동자의 몸엔 초가시성이 부여된다. 


토론: 이동후


  핵심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는 ‘기다리는 시간’이란 표현은 플랫폼 배달 노동의 복잡하고 확장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의 실천’이란 측면에서 이 표현을 정확히 어떤 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한국이란 특수한 지리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 배달 플랫폼 노동은 다른 플랫폼 노동과 비교해서 어떠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갖고 있는가.


  논문에서 강조되는 시간 주권, 삶의 통제력, 존중, 집합적 돌봄 등의 가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가치라고 볼 수 있는가.


채석진의 짧은 답변


  ‘기다리는 시간’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큰 개념이다. 


  어떻게 공통점을 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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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4: 배주연 

주제: 가상세계 vs. ‘현생’, 혹은 가상세계로 ‘현생’ 살기


  디지털 네이티브라 불리는 세대에게 온라인 공간의 의미는 단순한 가상 세계를 넘어선다. 사이버 문화의 특징으로 개인의 문화 생산, 커뮤니티 문화, 생산의 문화가 있는데, 여기서 개인은 개인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아이디와 아바타를 만들고 가상의 공동체와의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여 고유한 문화를 만들고 공유한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넥슨에서 서비스하는 ‘일랜시아’라는 게임의 유저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영화에서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을 현실의 ‘나’와 게임 속 케릭터 ‘내언니전지현’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는다. 그리고 게임 이용자 수가 줄어들고 불법 프로그램 매크로가 성행함에도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게임을 떠나지 못하는데, 이들은 그 이유로 ‘일랜시아’에 자신들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디지털 공간은 전통적 개념의 장소에서 벗어난 새로운 공간이지만, 상호교류와 만남이 일어나고 관계를 통한 역사성과 정체성이 발현되는 장소이다. 이렇게 정체성과 관계, 역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공간 또한 장소라고 할 수 있는 한편, 익명성과 일시적 정체성이란 점에서 동시에 비장소의 성격을 갖고있기도 하다. 영화 감독은 가상세계와 현생을 분리하지 않고 공존하는 혹은 서로를 견인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디지털 공간은 장소이자 비장소이며 언제든지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


토론: 황미요조


  가상세계와 현생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나, 실제 일랜시아 유저들이 디지털 공간을 그렇게 보고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영화가 그렇게 구도를 설정하고 주장하는 것인지 구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일랜시아라는 가상의 공간이 현실 공간과 연결되는 공간이라면, 게임 속에서 매크로라는 프로그램이 불법으로 성행하고 있지만 동시에 유저들을 평등하게 만들어준다는 의견에 의문이 든다. 매크로 불법 프로그램의 효과와 기능을 공정과 연결해서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가.


배주연의 짧은 답변


  편법이지만 매크로를 통해 평등해질 수 있다. 상식이 무너진 세계로 보일 수 있으나 새로운 공정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여지 또한 생겼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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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5: 유인혁

주제: 권혁주의 웹툰 씬커와 정지돈의 소설 야간경비원의 일기에 나타난 저항의 공간적 실천


  웹툰 ‘씬커’와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 두 작품은 폐쇄적인 도시 공간을 탈환, 탈주하고자하는 욕망을 ‘해킹’이라는 행위를 통해 표현한다. 여기서 해킹은 일탈적인 기술의 실천이자 동시에 저항의 공간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두 작품 모두 도시를 금지와 통제가 일상화된 공간으로 그리고 있으며 이러한 공간에서 해킹, 금지된 장소로 이동하거나 규제를 따르지 않는 행위는 도시 경험을 확장하거나 회복하는 행위이다. 이는 곧 주체에게 공간을 돌려주고 도시의 사용 범위를 증가시키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웹툰 ‘씬커’의 중인공은 일종의 반문화적 행위주체로 나타난다. 그는 해커이면서 동시에 파쿠르 트레이서이기도 한데, 정해진 길로 통행하지 않는 파쿠르의 특성이 도시 환경에 대한 전복적인 공간적 실천의 성격으로 드러난다. 즉 주인공은 파쿠르와 해킹을 통해 타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도시를 경험하며 스스로를 반문화적 주체로 공고히 한다.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해킹은 야간 경비원이라는 소외된 주체와 해커라는 위법적 주체가 결합된 개념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야간 경비원은 건물주의 재산을 지키는 노동자라는 점에서, 서울스퀘어라는 상징적인 장소에서 근무함에도 비정규직이라는 점에서 비가시화된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비가시적인 존재이기에 금지된 공간으로의 침투가 용이하여 주인공은 서울스퀘어의 벽면 전광판을 해킹하여 본인의 메시지를 전송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해킹은 도시의 주도권을 상징적인 방식으로 탈환하는 행위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토론: 홍덕구


  두 작품을 통해 ‘도시를 해킹한다’라는 행위를 폐쇄적인 도시 공간을 탈환, 탈주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저항의 공간적 실천으로 의미화하고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재현된 해킹이 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정도로 급진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가.


  두 편의 작품으로 ‘소수자성’에 대해서 어떤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가.


유인혁의 짧은 답변


  두 텍스트를 본격적인 저항을 그리는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충분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진지한 예술의 부정성을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대중문학으로서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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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사회자: 이양숙


전체 토론


- 이현재 -> 김은주

  커머닝이란 단어를 사용한 의도가 궁금하다.


- 김은주 답변

  커먼즈 보다 커머닝으로 얘기한 이유는, 플랫폼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커먼즈를 명사화했을 경우 소유권화 되거나 재산개념이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 관계를 만들어내는 역량을 키우는 동사적 의미로 커먼즈의 주요한 의미를 사용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이현재 -> 홍남희 

  데이터 액티비즘의 의미를 말함에 있어서, 기존의 질서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님을 디지털 시대에서 우리가 더욱 강조해야할 부분이 아닌가. 이것이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방식이 아닌가.


- 홍남희 답변

  무조건 디지털 문화를 긍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데이터 액티비즘엔 이 사회를 바꾸려는 함의가 있고, 이는 부정의에 대한 리액티브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데이터 액티비즘의 실천적 방안으로 어떤 것이 있는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 이현재 -> 유인혁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해킹의 사례가 아도르노 식의 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저항은 아니라고 발표하셨다. 요즘 사회적인 실천 행위를 얘기할 때 전면적 부정행위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나, 그럼에도 이루어지는 행위가 해킹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두 작품을 제시하신 이유는 디지털 폴리스의 이러한 특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인가.


- 유인혁 답변

  포스트 담론 이후에 진정한 비판, 진짜 대안적인 서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우리 문화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합의 중 하나라면, 시민이나 주체들의 실천에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킹이라는 일탈에 대한 욕망이 두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상품화될 만큼 욕망이 대중에게 일반화되어있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유인혁 -> 배주연

  유저들이 만든 사회를 얼마나 긍정할 수 있는가. 매크로는 어느 정도는 부정적인 프로그램이 맞다. 하지만 개발사와 유통사가 게임 업데이트를 포기한 상황에서 매크로는 게임에 생명을 불어넣고 게임을 전유하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매크로에 대한 입장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지 않나.


- 배주연 답변

  영화 내에서도 매크로에 대한 이중적 시선이 분명히 드러난다. 버려진 게임에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에 대한 일종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매크로가 가진 불공정성을 제기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영화에서 매크로를 생각하는 방식들의 차이, 공정하다는 의견과 불공정하다는 의견이 양립하고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 이양숙 -> 채석진

  어떻게 정의를 인지하여 공정 감각으로 만들어내고 공동체원들과 공유할 수 있는가. 디지털 경제나 알고리즘의 비가시성, 노동자가 초가시성으로 부각되는 구조에서 노동자가 스스로를 기업가로 인식하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 채석진 답변

삶의 통일성은 다 같이 구축해야 가능한 문제다. 현실의 삶이란 실제 이렇게 작동하기 때문에 법적인 해결은 저 사람의 몫으로 넘길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연결된 사회에서는 나에게도 책임을 가져오는 태도가 중요하다. 디지털 폴리스에서 어떻게 우리의 책임으로 만들 것이고, 어떻게 연결망을 새롭게 구성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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